[책] 한병철 <서사의 위기> 후기. 우리는 언어와 이야기를 박탈당했다.

작성 : 2023-12-12수정 : 202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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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


한줄평

존재하나 침묵한다. 언어를 박탈당하고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는 서사의 위기 아래 살고있다.


리뷰

<피로사회>를 쓰신 한병철 작가님께서 쓰셨는데 특이하게도 독일어로 먼저 작성하시고 이후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서사의 위기

에 대한 철학책으로 처음 읽을 때는 글을 읽는 것만도 벅찼다. 다행스럽게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서술 방식, 뒤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 그리고 독서모임이라는 강력한 동기 덕분에 완독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각들이 부유한다. 책의 문장들을 정리하며 어릴 적 잠자리를 잡을 때처럼 애써 생각을 잡아본다.


“노하우의 시대가 아니라 노웨어의 시대다”, “기억보다 기록이 중요하다”, “너의 머리를 믿지 마라”, …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일을 하며 나는 점차 기억하기보다 기록에 의존하기를 선택했고, 노션 페이지는 갈수록 늘어난다. 망각을 두려워할수록 기록에 의존한다. 나중에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아도 ‘혹시 모르니까’하는 생각에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점차 많은 것이 기록되지만 나는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기록에 밀려 퇴화한다. 내 글, 말, 행동은 점차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고 데이터를 생산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밀려온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갔을 뿐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럴수록 나는 AI에 대체되어 갈 뿐이다. 정보의 시대에 내 삶을 지켜내고 내 서사를 지켜내는 것, 서사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략한 틈 속에서 이야기할 여유를 찾아야 한다.


최근 이력서와 개인 웹 사이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기록에 치중된 나머지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력서는 정보의 나열일지언정 나를 소개하는 웹 사이트에는 나에 대한 서사를 드러낼 수 있도록 다시 고민해 봐야겠다. 최근 글또 9기에 합류하며 ‘삶의 지도’라는 글을 작성한 적이 있다. 내 삶의 서사적 맥락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였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다시 깨달았다.



  • 사전 상으로 스토리(Story)는 이야기다. 하지만 책에서 사용하는 스토리와 이야기는 다르다. 영화 용어로 비유했을 때 스토리는 스토리와 유사하고, 이야기는 플롯이나 내러티브와 유사하다.

    • 스토리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객관적인 사실이나 정보이며 다음 스토리로 대체된다.

    • 이야기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이야기는 서사이자 동화다. 서사는 맥락, 이야기, 삶이다. 시작과 끝을 연결하여 방향성을 가진다.

    • 정보는 시간에 대해 좁은 폭을 가지며 찰나의 순간에만 의미를 가진다.

    •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시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 내 생각과 느낌,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정보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
  • 현대 사회에 우리는 눈 앞의 이슈에 매몰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유튜브 쇼츠에는 서사가 없다.

    • 시선은 하나의 이슈에서 다른 이슈로 이동한다. 스토리나 쇼츠나 신문이나 한 이슈에서 다른 이슈로 쉽게 이동한다. 길고 느리게 머무르는 시선은 없다.

    • 스토리에는 오로지 순간만이 중요하다. 어떠한 서사도 없다. 단순한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 이야기하지 않고 게시하는 스토리에는 ‘나’에 대한 의미가 결여되어있다. ‘좋아요’를 누르며 애써 공허해진 삶을 외면한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영구히 재생산한다. 셀카는 텅 빈 자기복제다.

    •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그저 짧게 인식된 뒤 사라지는 정보다.

  • 소통 없는 공동체로서의 이야기 공동체에는 침묵과 고요한 조화로움이 지배적이다.

    • 우리는 이야기하지 않고 과도하게 소통한다. 소통 없는 공동체는 공동체 없는 소통에 밀려난다.

    • 신자유주의는 성과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람들을 분리시킨다.

    • 공동체 이야기는 자기실현 모델의 개인 서사로 분해된다.

      과도하게 급증하는 개인 서사가 공동체를 잠식하고 공동체 이야기 형성을 어렵게 한다.
  • 우리에게는 서사가 필요하다. 삶은 이야기다.
    •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하며 기억을 통해 이야기한다.

    • 이야기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은 잊어버리거나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야기에는 여유가 필요하며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 효율의 논리는 이야기와 조화될 수 없다.

    •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건을 이으며 고립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 기록에는 틈이 없다. 덜 이야기 될 수록 더 많은 정보가 생성된다.

    • 디지털 플랫폼은 전체 삶의 기록화에 쓰이고 모든 삶은 데이터로 전환된다.

    • 스마트폰은 디지털 파놉티콘이다.

    • 모든 것이 유리로 된 투명 사회는 이야기와 기억의 종말이다.

    • 설명 가능한 세계는 이야기가 불가능하다.

    • 사물은 존재하나 침묵한다.

      날것의 현사실성은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하여 탈신비화한다.

    • 지능은 계산하고 정신은 이야기한다. 데이터는 정신을 몰아낸다.

    • 이야기할 능력은 위축되어

      언어를 박탈당하고, 정보를 설명하는 수식만이 살아남는다.
  • 의식은 꿈과 기억을 이용해 외부의 자극을 감당가능한 수준으로 소화하는 방어 장치다.

    • 늘어난 충격량에 비례해 지각은 둔해진다.

    • 우리는 스마트폰에서 축소된 현실을 인식한다. 충격은 좋아요로 대체된다.

  • 스마트폰은 타자의 시선을 앗아가 관계를 효율적으로 차단한다.

    • 스크린 속 상대의 타자성을 박탈하고 타자는 소비된다.

    • 얼굴은 거리 유지를 요구하지만 스마트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터치하고 밀어버린다.

  • 모모로 소개되는

    올바른 경청은 타자를 타자성에 그대로 두는 것

    이다. 타자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며 스스로 지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도와주고, 공명의 공간을 제공한다.

    • 이야기는 치유의 힘이 있다. 스스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치유된다.

    • 접촉은 이야기하기처럼 신뢰를 형성한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길은 내 아픔을 이해받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편안함이 있다.

  • 빅 데이터는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지만 그 이유와 맥락은 설명할 수 없다.

    • AI는 이해하지 않는다. (중국어 방 문제)

  • 스토리텔링에도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

    •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셀링의 무기가 되었다. 즉,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 스토리텔링의 서사는 정보의 특성을 지닌다. 덧없고, 임의적이고, 소모적이다.

    •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어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 여기에 서사의 위기가 있다.

    • 서사는 감정을 건드려 이성을 거치지 않고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 동일한 제품에 대해 고부가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서사다. 와인, 위스키, 커피, 명품, 파타고니아 등 우리는 이야기를 소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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