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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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대답이자 그의 삶을 통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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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번복하며 스튜디오 지브리(이하 지브리) 사상 최대 비용과 최장 제작 기간을 들여 만든 작품으로, 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로부터 주제와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이에 비해 신기할 정도로 마케팅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영화의 성격을 잘 나타내며 오히려 바이럴 된 것 같기도 하다. 영제로는 ‘The Boy And The Heron’인데 왜 이렇게 초월번역 되었는지 모르겠다. 극 중에서도 책이 실제로 나오는 만큼 일본어 원제(’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를 그대로 따라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서로 제목을 다르게 기억하는 게 밈이 되어버렸는데 미야자키 무야호의 그대들은 어쩔티비라고도 한다고…
영화의 평은 호불 호가 갈리며 불호 쪽은 난해하다, 설명이 부족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떡밥을 뿌리기만 한다 … 라고 평가한다고 들었다. 꽤 무시무시한 평 속에 지브리 영화 중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라 더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화는 꽤나 많은 다른 지브리 영화들을 떠오르게 했다. 전쟁의 분위기는 <붉은 돼지>, 숲과 호수 등 자연의 모습은 <모노노케 히메>, 터널 같은 굴을 지나 들어간 탑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설정을 넘나드는 동화같은 내용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닮았고, 탑 속의 세상(이하 탑)이 멸망하는 모습은 <천공의 성 라퓨타>를 닮았다. 이렇게 지브리의 영화들을 하나씩 나열하게 되는 것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있어 이 영화가 어떤 무게를 가지는 지 어렴풋이 가늠되는 것 같다. 이미 전작들을 통해 일관되게 반전, 평화, 도덕 그리고 삶에 대해 이야기 해왔다. 이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세상에 대한 자신의 더 깊어진 철학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주인공인 마히토의 설정 중 많은 부분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의 삶과 비슷하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군수 공장을 운영했으며, 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궁핍할 때에도 1000평이 넘는 저택에서 부유한 삶을 영위했다. 그의 집에는 영화처럼 호수가 있고 숲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의 참상 속에 얻은 부유함으로 자란 그는 이 자전적인 영화를 통해 자기반성적 면모를 보인 다. 바로 극 중에서 군인을 부리고 돈으로 위세를 떨지만 결국 무엇하나 해결하는 게 없는 무능력한 아버지와 탐욕으로 인해 파시즘 아래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난 개체 수와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의 끝에서 자멸하는 꼬리앵무들이다. 이 꼬리앵무들이 등장할 때 깃발에 Duch를 보여준다거나 하는 등으로 이들이 파시즘과 나치 독일을 묘사하는 것임을 꽤나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화마로 시작한다. 전쟁 중 폭격으로 불길에 휩싸인 병원에서 마히토의 어머니인 히미가 죽게 되고 이후 마히토의 아버지는 히미의 동생인 나츠코와 새로 연을 맺으며 히미가 자랐던 집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병원을 향해 달려가는 마히토를 묘사할 때 주변이 번지고 소리가 먹먹하게 변하는 것을 통해 마히토의 심리를 공감각적으로 탁월하게 묘사했고, 이 사건은 마히토가 살아감에 있어 떨칠 수 없는 트라우마로 응어리지게 되었다. 탑이 어느날 떨어진 돌의 힘으로 큰할아버지가 만든 세상이었다는 것을 보면, 갑자기 떨어진 운석의 힘으로 현실과 다른 더 완벽한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과 한 순간 미사일이 떨어지며 발생한 사건으로 이전과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된 마히토의 모습에서 전쟁 속 현실이 아닌 평화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소망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펠리컨들을 통해 불완전한 세상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음에는 아기로 탄생해야 할 와라와라들을 잡아먹는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들은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며 이런 환경을 벗어나고자 높 이 또 멀리 날아보아도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고 어느 순간 날지도 않게 된 펠리컨들이었다. 귀엽게 날아가는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잔인한 펠리컨들이라는 모습 뒤에는 와라와라들이 날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 내장을 먹은 것과, 와라와라를 먹어야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펠리컨들의 모습이 있었다. 마히토의 앞에 죽어가는 모습으로 등장한 펠리컨이 호소하는 현실은 자연이 아닌 특정 한 종에 연민을 느끼는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자연 앞에 모든 종은 평등하다. 호모 사피엔스로 태어나 섭식의 굴레 속에 살며 악의 없는 순수를 지킬 수 있을까? 탑 속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악의가 묻지 않은 돌들로 흔들리지 않는 탑을 쌓는 것이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13개의 악의가 없는 돌들을 건네며 이 세상을 유지해주길 바랐지만, 스스로 만든 관자놀이의 상처를 가리키며 이미 나는 악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며 거절한다. 와라와라들에 연민을 느끼고 펠리컨들을 물리치기를 바란 순간부터 악의가 없는 돌을 만질 수 없는 내 한계가 명백해졌다.
나츠코는 출산을 위해 탑으로 들어가 꼬리앵무들의 영역 안에 있는 산실로 들어가는데, 아마도 되물림되는 전쟁에 순응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히토의 여정은 나츠코를 데려오기 위해 출발한 것으로 펠리컨 - 꼬리앵무 - 돌의 위험을 이겨내고 같이 현실로 돌아온다. 돌에게 내 아들이 될 아이를 돌려달라던 히미의 모습과 불길 속에 죽는다는 것을 알지라도 다시 마히토를 아들로 만나기 위해서 웃으며 문을 여는 히미의 모습이 겹치며 불이 가진 파괴적인 힘이 아닌 같이 살아가는 온기가 느껴진다. 마히토의 모험은 개인적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개인적 성장이자 전쟁으로 이어지는 세대를 끊어내고 새로 태어날 생명과 함께 살아가자는 감독의 철학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추구해온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와 <나니아 연대기> 같은 영화들을 생각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어려운 것 같지 않았다. 이 영화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지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답이자 물음이다.
OST는 역시나 기대 이상으로 너무 좋았고, 포스터에도 나온 왜가리의 디자인과 움직임도 무척 좋았다. 그렇지만 왜가리의 진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부연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도 영화를 보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남기 위한 것은 자연스럽고, 자멸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영화 속 어느 종족도 같은 종족을 해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살상을 위한 더 효과적인 무기를 발명하기 위한 노력으로 많은 기술들이 발전했다. 우리는 스스로 자멸할 방법을 찾은 유일한 종이다. 자, 이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